Pink-Freud

 


still life(after Steenwyck), oil on canvas ,145.5x112.1cm, 2009
 
 
 
 
 
 
                                         
                                                         Pink Freud Garbage Bag, oil on canvas, 72.7 x60.6cm, 2009






                                         
                                                 Afternoon, oil on canvas, 162.2 x130.3cm, 2008


 
 



1                                                        Velazquez’s Room, oil on canvas, 200x240cm, 2009


PinkFreud-color tape ll, oil on canvas, (91.0x116.8cm)x2, 2009
 
 
 
 
 
 
PinkFreud-통증, oil on canvas, (100x100cm)x2, 2009
 
 
 
 
 
 
 
 
PinkFreud-ink, oil on canvas, 72.7x53.0cm, 2009
 
 
 
 

핑크 방에 가득한 ‘불안’

글|이대범 (미술평론가)

빛바랜 핑크색이 가득한 정고요나의 작업에는 입구는 있으나 출구는 없다. 그 입구는 대개 창문, , 코너일 경우가 많다. 물론, 입구는 그 상태 그대로 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고요나는 그것을 입구로만 사용한다. 가령 <핑크로이드-통증1>(2009)에서 창문을 블라인드로 가리고 있지만, 여전히 그 틈 사이로 외부의 빛이 들어온다. 그리고 창문 하단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이 뚫리면서 떨어져 나간 파편이 내부에 고스란히 놓여 있다. 이러한 힘의 방향성 생성한 결과는 창문이 출구의 기능이 거세된 입구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소한, 그러나 최대한의 개입

이러한 출구가 거세된 입구의 형태는 정고요나 작업 전반에 나타난다. 커튼이 드리워진 <핑크프로이드-잉크>(2008)에서 외부 세계는 흐릿하게나마 가시적으로 포착되지만, 반사하면서 투과하는 유리에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유리창에 맺힌 내부의 상은 찾을 수 없으며, <벨라스케스의 방>(2009)에서도 반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외부의 빛은 내부로 들어오나, 내부는 내부에 있는 거울에 의해 외부로 나가지 못하고, 그 공간 안에서만 반사 될 뿐이다. 그렇다면, 정고요나는 왜 입구와 출구의 기능을 가진 창문과 문을 입구로만 그리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선 이전 작업으로 에둘러 가면, <오후>(2008)가 주목할 만하다. <오후>는 어두운 계단에 누군가 벗어 놓았는지, 또는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신발이 외부에서 들어온 강한 빛을 받고 있다. 그리고 한 켠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문이 무심히 놓여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부자극()에 의한 공간의 변모이다. 어두운 실내공간은 여느 때와 같이 그대로지만, 어디서 왔는지 모를 외부자극()에 의해 화려하게 밝은 공간과 어두운 공간으로 양분된다. 그러나 내부의 본질 자체를 변모시키는 외부자극이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내부에 들어왔는지는 숨겨져 있다. 단지 우측 상단에 최소한으로만 자리한다. 최소한의 입구를 통해 들어왔지만, 내부의 본질 자체를 흔들어 놓기에 내부에게 외부자극은 ‘불안’의 요소이다.

빛바랜 핑크

이번 전시에서 <오후>가 내포했던 ‘불안’은 작품 전반에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산발적으로 흩어진 원색의 압정, 엎질러져 있는 페인트, 불안하게 쌓여 있는 원색의 테이프와 페인트 통, 창문 앞에 놓인 깨진 컵, 엎어진 잉크 등이 그것이며, 이 모든 것들은 아우르는 ‘(빛바랜) 핑크’가 있다. 누구도 강요한 적이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회적 신념으로 굳어버린 여성과 핑크의 관계를 정고요나는 작품에 직접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핑크색을 사용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빛바랜’ 핑크색이라는 점이다. ‘빛바랜’ 핑크는 말끔한 표면을 긁고 지나간 상처로 보인다. 사회가 특정 관념으로 고정하려 하지만, 그 마저도 강한 외부자극에 의해 ‘빛바랜’ 상태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오후>에서 순간적으로 보였던 ‘불안’이 작가에게 내밀하게 쌓인 상태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불안하게 쌓여 있는 원색의 테이프와 페인트에서 볼 수 있듯 ‘불안’한 상황을 직접적 형상화 한다고 해서 그것의 의미가 가중되거나, 심오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빛바랜) 핑크’가 내포했던 삶의 의미로서 ‘불안’의 의미를 한정적 의미로 축소시키는 효과를 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핑크프로이드-쓰레기봉투>는 주목을 요한다. 여타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배경은 빛바랜 핑크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화면의 중심에는 쓰레기가 가득 담겨진 비닐봉투가 있다. 단순하면서도 작은 이 그림이 시선을 잡는 것은 작가가 언급하고자 했던 ‘외부자극’과 ‘불안’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 함축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핑크프로이드-쓰레기봉투>에는 외부 자극이 들어올 수 창문(혹은 문, 코너)이 없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은 외부에서 들어와 삶을 영위했던 흔적을 간직한다. 휴지, 종이, 그리고 종이컵 등의 구겨진 형태는 작가가 삶을 지속하면서 쌓여온 ‘불안’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차곡차곡 쌓여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나가지 못하고 여전히 빛바랜 핑크 방에서 넘쳐난다. 이것은 어떤 오브제 또는 이미지보다 강력하게 ‘불안’이 작가와 접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을 마치면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핑크프로이드-쓰레기봉투>에서 보여준 작가와 내밀하게 연동하는 ‘불안’(불안의 이미지 혹은 불안의 형상 자체가 아닌)이 다음 작업에서 지속되기를 기대해본다. 아마도 그것이 출구는 없고 입구만 존재하는 방에서 외부와 할 수 있는 소통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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